김준철의 벌거벗은 임금님

2021.04.17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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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와인협회 ‘김준철’ 회장님의 와인칼럼/
‘네 번째’

벌거벗은 임금님



“와인이 자연의 산물인지, 인간의 작품인지를 놓고 벌이는 논쟁을 보면 와인의 역사는 모순의 역사이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와인을 마신다. 와인에는 몇 푼 안 되는 싼 것도 있고 웬만한 사람이면 꿈도 꾸지 못할 비싼 것도 있다. 와인은 신이 내린 선물인 동시에 악마의 유혹이다. 예절과 교양의 상징인가 하면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병폐이기도 하다. 건강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해로울 때도 있다. 이처럼 복잡 미묘하기 때문에 와인의 역사는 매력적인 것이다.”
<로드 필립스의 ‘와인의 역사’>
 


화려한 포장으로 둘러싸인 와인
우리나라에서도 와인에 대한 관심도가 점차 높아가면서, 와인 관련 책자도 많이 나오고, 인터넷 와인 사이트도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이제는 와인을 가르치는 곳이나 모임도 꽤 많아졌다. 그런데 와인 관련 책자나 사이트를 보면 와인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보다는 와인을 이렇게 마셔야 된다든지, 와인의 맛을 표현할 때는 어떻게 한다든지, 아니면 프랑스 어디를 가서 어떤 와인을 누구와 함께 마셨다는 등 상당히 피상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와인을 안다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와인을 화려한 포장으로 둘러싸서 무언가 신비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어, 와인 초보자들은 환상만 보고 감탄하다가, 진정 와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얻어가지 못하고 혼란만 더할 뿐이다.
 


까다로운 와인
와인 마시는 데 왜 까다로운 규칙을 내세우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와인은 즐겁게 마시는 술이다. 이렇게 마시든 저렇게 마시든 무슨 흉이 될 수 있을까? 잔을 잡을 때도 볼을 잡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잠깐 입에 올렸다가 내려놓는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와인의 온도가 올라갈 수 있을까? 외국 사람들 와인 마시는 자세를 보면 볼을 잡는 사람이 더 많다.

또 하얀 바탕에 눕혀서 색깔을 보고, 흔들어서 향을 맡고, 그냥 삼키지 않고 입안에서 굴려라? 이것은 마시는 법이 아니고 테이스팅(Tasting)하는 방법이다. 즉 와인을 감정하는 방법이다. 어쩌다가 이 면밀하게 행하는 테이스팅 방법을 와인 마시는 방법에 적용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기야 ‘Tasting’을 ‘Testing’이라고 써 놓은 곳도 많다.

와인을 마실 때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이고, 와인을 감정한다는 것은 와인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엄밀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와인을 감정할 때는 규격에 맞는 잔을 선택하고 체온이 전달되지 않도록 잔의 아랫부분을 잡고 색깔, 향, 맛 등을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그렇지만 식사 때나 모임에서 와인을 마실 때는 즐겁고 편하게 마시면 된다.



와인에도 전문분야가 있다
우리는 와인의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와인은 그 종류도 엄청나게 많고, 또 워낙 관련 범위가 넓기 때문에 아무리 배워도 끝이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와인 한 병을 마실 때까지는 포도를 재배하는 사람과 와인을 만드는 사람, 이를 유통시키는 사람,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서비스하는 사람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각 전문분야를 거치게 된다. 이렇듯 와인은 우리에게 다양한 세계를 접할 수 있게 해 주기도 하지만, 이에 따라 와인지식은 더 복잡하고 어려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는 와인 전문가도 자기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다른 전문가에게 질문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 각각 공부한 분야가 다른데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방송이나 잡지에 많이 나오거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을 자랑하는 스타의식에서 벗어나 좀 더 내실을 기하는데 전념해야 한다.
 


까막까치밥나무 냄새가 난다고?
그리고 와인의 맛을 묘사하는데도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카시스(블랙커런트)’라는 과일을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으면서, 이것을 ‘까치밥나무’, ‘까막까치밥나무’ 심지어는 잘못 옮겨와서 ‘까치밤나무’ 등 멋대로 번역하여 그 맛과 향이 난다고 하지만, 이 식물은 우리나라에 없기 때문에 우리말이 있을 수 없다. 와인의 향을 표현하려면 다른 사람이 고개를 끄떡이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테이스팅이란 “와인을 시각적, 미각적, 후각적으로 검사하고 분석하여, 느낀 점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설사 내가 블랙커런트 향을 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모르면 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나만 아는 향으로 표현해서 다른 사람에게 혼란만 준다면 차라리 카베르네 소비뇽 냄새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 외에도 우스운 표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삶은 계란을 막 깔 때 풍기는 황화수소 냄새를 유황냄새라고 한다든지, 광물질 향, 금작화, 동물 향 그리고 난데없는 산사나무까지 이 모든 것은 따지고 보면 ‘아로마 휠’이란 데서 유래된 것 같다. 이 아로마 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물질을 구해서 향을 추출해봐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테이스팅 전문가들도 무조건 말도 안 되는 말로 서툴게 번역하여 내 놓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 둘 자기가 직접 그 향을 구해서 냄새를 맡아봐야 한다.
 


와인 가지고 너무 호들갑 떨지 말자
하나 더 제안한다면, 하찮은 와인을 가지고 너무 호들갑 떨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와인 서비스하는 온도를 지정하여 화이트 와인은 몇 도, 레드 와인은 몇 도 하지만, 실제로 와인의 온도를 측정해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와인 마니아들 중에 온도계를 가지고 서빙 온도가 정확한지 매번 온도를 재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또 빈티지라는 것도 차트를 놓고 따져봐야 거기서 거기다. 한 병에 몇 십만 원짜리 이상 하는 고급와인은 빈티지에 따라서 가격 차이가 심하지만, 쉽게 마시는 와인은 그 차이도 없다. 그리고 와인의 보관도 마찬가지다. 진동이 없고, 온도가 낮고 어두운 곳이 좋다고 하지만, 이것도 귀한 고급와인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값싼 와인은 일반 냉장고면 충분하다.

우리가 쉽게 접촉하는 와인은 멀리 놓고 우러러보는 술이 아니다. 정말 좋은 빈티지에 명산지에서 나온 고급와인이라면 이제까지 우리가 배운 대로 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까다롭게 다룰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에 퍼진 와인지식은 최고급 와인을 다루는데 적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언제 어디서나 와인을 쉽게 즐길 수 있는 풍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제는 할 말을 해야 한다. 누군가 와인에서 ‘동물 향’이 난다고 하면, 과감하게 “나는 그 향을 못 느낀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와인을 아는 척하는 사람의 말에 현혹되어서는 와인지식은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 저기 임금님이 벌거벗고 가면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외칠 수 있는 순진한 어린애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와인지식도 늘고 테이스팅 능력도 향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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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준철 (Jun Cheol Kim)
(한국와인협회 회장, 김준철와인스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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